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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인문학, 철학

"위기를 기회로" 의로운 임금 정조

by Crisi-Tunity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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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ixabay / 종덕 지

"의로운 임금의 대명사 정조"


조선의 22대 왕 정조, 그는 유년시절 자신에게 닥칠 험난한 삶을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생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는 비극적 죽음을 기점으로 그의 임금으로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한 영조를 향한 절박한 외침으로 어려서부터 내면의 강인함을 갖추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조는 조선의 모든 임금들은 그러하듯 제왕학에 있어 중요한 유교의 주요 경전과 역사를 배우며 역량을 키워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리더십은 생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조부 영조로부터 얻게 된 것도 많다
영조는 국왕이 직접 많은 것을 깨우쳐 되려 신하를 가르쳐야 한다는 국왕이었기에 정계를 넘어 학계도 주도하고자 했다.

원손 시절의 4세 정조는 공자의 가르침인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 10자를 외우고 '부모' 두 글자를 쓸 수 있었다. 영조는 이에 정조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기뻐했다. 이후에도 정조가 한번 본 사람을 구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영조는 6살 정조에게 부자유친 등 오륜의 내용이 담긴 [동몽선습]을 외우게 했고 7세에는 [ 소학]을 외우게 하였다.수시로 경연 자리에 어린 정조를 불러 이를 점검했고 나아가 신하들와 토론하게 함으로써 그가 유교적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디딤돌을 마련해 주었다.

정조는 경학 외에도 무예를 단련하는 데에도 관심을 보였고 재능도 있었다. 그는 활쏘기를 즐겼는데, 즉위 이후 정조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기록되어 있다.

<대리청정 시기 : 조력자의 도움으로 살아남다>

세손시절의 정조는 정치적 흐름에 의해 위기가 여러차례 있었다.  노론 벽파에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신경썼다. 그를 돕은 조력자로서는 홍국영이 있었다. 그는 세손에게 불리한 자료로 작용할만한 자료, 물건들을 찾아 제거했고, 사부인 김종수는 당론에 맞서며 택군이라며 벽파를 공격했고 외척이 주를 이룬 벽파와는 다른 또 다른 정파를 구성하기도 했다. 청렴함과 명예를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 내에서의 청명류였는데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를 유배보내기도 했지만 다음 해 방면되었다. 영조 51년, 영조가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벽파는 이를 반대했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했다.  홍국영은 이들 중 주요 인물인 홍계회, 김상로 등을 탄핵했고 세손은 태생적 정적으로부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즉위 이후 : 본격적인 행보>

정조는 즉위 이후 거침이 없었다. 즉위식에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여 노론 벽파에 선전포고를 했고
1777년 경희궁에 괴한이 침입했던 정유역변 사건의 진상을 밝히며 홍국영을 통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여 입지를 단단히 했다. 정조의 조력자였던 홍국영은 정조의 세손시절과 즉위 이후의 신변을 지켜냈지만 이후 무리한 왕권 강화를 도모하며 몰락했고 정조는 이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정조는 창덕궁의 후원에 영조의 글과, 어진, 유품을 모아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규장각을 통하여 학문을 통한 정치 구현의 발판을 마련했다. 규장각에서 검서관 제도를 통해 서얼 출신의 인재인 이덕무와 박제가 등을 의도적으로 등용하여 서얼 출신이 능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당시 사회적 계급제도를 넘어선 파격적이고 실리적인 선택을 했다.

군사제도에 있어 군력과 군비의 낭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시키고 , 5군영의 장군 임명을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는 방식으로 해서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했다. 정조는 군사훈련 교재인 <병학통>을 직접 짓는 등 군사 훈련을 중요시 했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고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초기 30명의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8,000 명까지 늘어났다. 장용영 장교는 무과를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양반의 서얼과 평민 가운데에서도 급제자가 많았다. 장용영은 정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정예군으로 성장하였으나, 정조 사후 순조를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에 의해 해체되었다

정조는 정치적 방향으로 탕평 정책을 추진했다. 노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척신 세력에 대비되는 청류를 끌어들여 탕평을 펼쳤다.  또한 소외되었던 남인을 등용했고 그의 정적인 벽파까지도 포섭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탕평 추진을 위한 물리력 확보를 위해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했다. 정말 거침없고도 지혜로운 행보이지 않았나 싶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통공 정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득권의 표상이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 상인인 난전의 안정을 추구했다.

종합해보자면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며 통합과 조화로움을 추구했다.
불행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었을 그이기에 통합을 중시했다는 이런 점은 정말 감탄이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잘 알고 있는 수원 화성.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헌릉원을 수원에 이장하고 수원 화성을 축조했다. 이후 능행을 명분으로 자주 거둥하였는데, 정조 19년 을묘 원행에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과거를 열고 신하 및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원행을 진행했다. 장용영의 군사들을 수반한 을묘 원행은 군주로서의 임금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당시 원행을 기록한 그림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를 보면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한다.


화성은 근본적으로는 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을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무덤 이장을 계기로 조성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원행을 통한 군사력 과시의 측면 뿐만 아니라 정약용을 통한 선진적 축성기술의 시험, 둔전을 통한 선진적 농업경영도 선보였다. 이곳에서는 앞서 상업 측면에서 언급한 통공 정책으로 자유로운 상행위도 가능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 그의 아픔과 신념이 모두 집대성되어 물리적인 유산으로 표현된 작품인 것이다. 

1800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책이 폐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삶의 위기를 극복한 한국사의 대표적인 위인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위안을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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