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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스포츠

코리안특급 박찬호

by Crisi-Tunity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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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Pixabay / David Mark

유년시절 ‘손가락이 결정한 운명’


박찬호는 어린 시절 체격이 호리호리한 마른 체격이었기에 운동선수로 대성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손이 사람 얼굴을 가릴 정도로 컸다는 것은 야구 투수로 성공할 징후였다고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박찬호의 손 특히 손가락은 어느 메이저리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긴 편이었다고 한다. 선동열은 선수 시절 손가락 사이를 칼로 째고 싶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이니 긴 손가락은 투수로서는 큰 복이었다.
박찬호는 공주 중동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고 코치의 권유로 육상부에 들어가 운동선수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보여준 준수한 주루플레이도 그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당시 초등학교 야구부 코치는 육상부에서 활동하던 박찬호를 보고 그를 야구부로 데려가려고 했고 육상부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박찬호 어머니의 중재 요청으로 교장 선생님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손가락이 긴 건 달리기와는 상관이 없으니 야구부로 보냅시다” 그렇게 박찬호의 야구 인생이 시작되었다. 
박찬호의 포지션은 3루수였다. 발이 빠르고 타격에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투수에 대한 욕심이 생겨 감독에게 부탁했으나 핀잔만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개인적으로 피칭 연습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여느 어머니와 같이 현실적인 판단으로 야구를 그만둘 것을 권했지만 어린 박찬호는 부모님을 설득 야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야구를 허락한 어머니는 야구 룰을 공부할 정도로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기 '성실과 집념'
공주 중학교로 진학한 박찬호는 오영세 감독을 만난다. 오영세 감독은 박찬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이다. 박찬호가 열망하던 투수로 전향을 시켜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오영세 감독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찬호의 자질을 알아보고 투수로 전격 전향시켰다. 3루수를 맡고 있던 박찬호는 내야수치고 빠른 송구와 손목 스냅이 좋았다. 이 부분을 알아본 오영세 감독은 투수 전향을 결정한 것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본격적인 투수 수업을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공은 빨랐지만 제구력에 문제가 있었다. 겨울방학에는 오영세 감독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새벽 7시 러닝부터 밤 10시까지 훈련을 하는 강도 높은 생활을 반복했다. 박찬호는 당시 옥상에서 연습하다 잠이 들 정도로 연습벌레였다고 한다. 공주중학교는 당시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4강에 네 번 드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박찬호는 공주고에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이 투수로서 자질을 발견한 시기라면 고등학교 시절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 시기이다. 공주고등학교 김정무 감독은 박찬호가 입학하자마자 3번 타자라는 중책을 맡기고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체라고 강조하면서 러닝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다. 공주 봉황산이 닳도록 뛰는 크로스컨트리, 운동장 돌기 등 강도 높은 훈련에도 박찬호는 한 번도 꾀를 부리지 않고 오히려 단체 러닝에서도 항상 선두에 있을 정도로 집념을 보였다. 그 결과 고교 입학 시 박찬호의 직구 스피드는 140km대였는데 졸업 무렵엔 150km까지 늘었다.      


진로 결정과 평판 '겨우 2천만원짜리 선수'
박찬호의 직구 스피드가 150km대를 넘나들자 한양대학교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한양대에서 가등록까지 진행된 상태에서 프로구단 빙그레에도 뒤늦게 관심을 보였다. 당시 빙그레에서는 박창호를 당대 최고였던 선동열을 능가하는 선수로 키워주겠다고 했고 박찬호는 그 말에 흔들렸으나 계약금은 고작 2천만원을 제시받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찬호의 동기 임선동, 조성민은 2억, 3억 소문이 있었으니 그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미·일 친선 고교 야구대회 ‘미국에 가다’
91년 8월 박찬호는 한·미·일 친선 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LA로 날아갔다. 그는 LA에서 또 한명의 인생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을 만난다. 당시 박찬호만 숙박할 곳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LA 상공회의소 이사를 맡고 있던 건축설계사 스티브 김은 그를 숙소로 데려간 호스트 역할을 했다. 이후 스티브 김은 박찬호의 연습을 보고 그는 박찬호에게 매료됐고 그가 LA다저스에 입단하는데 산파 역할을 하게 된다.
박찬호의 미국행에 있어 몇 가지 운이 좋은 일들도 있었다. 당시 그는 고교 대표단에 선발되지 않았으나 홍익대 송경수가 프로 계약 문제로 선수단에서 제외되면서 발생한 공석에 박찬호가 선발되었다. 미국에 가서는 스타 플레이어 임선동, 조성민의 컨디션이 좋지 않자 박찬호가 선발로 나섰는데 미국 스카우트들이 지켜보는 자리임을 알기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다.   

유니버시아드 대회
93년 미국 버팔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마침내 박찬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그의 구위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 스카우트들이 박찬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박찬호는 스티브 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다저스에서 누가 보자 단다. 아무도 몰래 빠져나와” 약속 장소에는 테리 레이놀즈를 비롯한 다저스 사람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근력, 체력 등을 테스트했다고 한다.

LA다저스 입단과 데뷔     
93년 10월 말 다저스 관계자들이 입국하여 병원에서 박찬호를 정밀 검사하는 등 극비리에 그를 영입하기 위한 첩보전이 벌어졌다. 스티브 김이 계약 대리인으로 나섰고 94년 1월 7일 박찬호는 120만 달러에 다저스와 계약에 성공한다. 
박찬호는 94년 4월 9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홈경기에서 4대 0 뒤진 가운데 메이저리그에 데뷔 등판했다. 1안타 2사사구 2점을 내주었다. 데뷔전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이후 선발이 무너진 경기에 투입되었는데 결과는 3이닝 4안타 3실점. 지역 매스컴에서는 박찬호를 마이너리그에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인인데다가 미국 야구를 몰랐다. 또한 구속 외 약점이 많았던 그가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것은 무리 다저스에서는 아시아에서 온 강속구 신인 투수라는 홍보 전략에 의해 시기가 앞당겨진 측면도 있었다. 결국 박찬호는 4월 말 다저스 산하의 더블A급 마이너리그팀인 샌안토니오로 강등되고 말았다. 


마이너리스에서 얻은 것들
좀처럼 메이저리그로 복귀를 하지 못하며 의욕상실, 향수병 등 문제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우상이던 놀란 라이언을 만나게 된다. 박찬호의 투구 폼인 하이킥도 놀란 라이언을 흉내 내면서 배운 것이었다. 박찬호는 그를 만나 많은 조언을 들었고 “열심히 해라. 끝까지 너를 지켜보겠다”라는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후 박찬호는 6월 28일 엘파소 디아블로스와의 원정 게임에서 마이너리그 첫 승을 따낸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에서 생활하며 한국 교포들의 응원을 받았고 본인을 통해 긍지를 갖는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어깨가 무거워지면서도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마이너리그 20경기 선발등판 5승 7패 방어율 3.55. 성적을 거뒀는데 결코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간 후튼 코치를 만나 폼을 수정하고 여러 가지 미국 야구에 있어서 불필요한 투구 습관들을 버리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성공
95년 그는 다시 메이저리그 엔트리에 복귀하게 되었다. 강속구와 배짱 그리고 제구력을 선보이며 누적 124승을 거두었고 당시 불경기 탓에 좌절 속에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는 스포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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